엄경섭, Managing Director of MCTC
“애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를 둘러싸고 있는 고치가 벗겨져야 한다. 선교사라는 이름은 우리를 겹겹이 두르는 고치가 되어 우리가 나비가 되는 것을 막고 있다.” -차남준
선교사에 걸맞지 않게 살고 형편없이 사역한다고 느끼는 즉시 선교사직을 내려놓고 호떡 장사를 하겠다고 처음으로 다짐했던 때는 내가 선교사로 헌신하였을 때였다. 호떡 장사를 하찮은 직업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지만, 선교사는 영혼을 복음으로 직접 마주치는 직업이기에 그 어느 직업보다 엄중한 부담과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한 생각 속에는 호떡 장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과 삶이 여간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일로 보거나 그 일이 선교사가 하는 일보다는 낮게 봄이 있었을 것이다.
이전의 직업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서양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선교사라는 개념은 우리와는 다름이 분명하다. 에티오피아에서 사역할 때 서양에서 온 동료 선교사들이 나를 선교사로 부른 적을 기억할 수 없다. 간혹 공식적인 자리에서 호칭이 필요한 경우 목사(Reverend)라는 호칭을 내 이름 앞에 넣어줄 뿐이었다.
SIM에 소속된 동료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접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들이 이전에 종사했던 직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의사가 다시 클리닉으로, 기숙사 보모가 대학의 행정 부서로, 선교사 자녀를 가르치던 교사가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갔다. 이들은 선교지에서 자신의 전문성으로 사역하고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서도 자연스럽게 그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더러는 아예 자신의 직업을 바꾸거나 개인 비즈니스를 시작하기도 한다. 간호사가 선교사가 되었다면 선교사가 다시 간호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와 나라에 있어서 간호사나 선교사는 그 가치가 똑같을 터이기 때문이다. 서양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직업 정체성은 선교사보다는 자신이 종사했던 직종과 좀 더 관련된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선교사는 직업인가
선교사는 직업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전통적인 개념에 있어서 선교사는 직업이었다. 먼 과거에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부르심을 확신해야만 했고, 타문화권에서 생존하고 사역하기 위한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했고 실제적 고국으로 돌아 오지 못할 확률도 높았다. 그래서 교회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선교사라고 불렀다. 그 시대는 “모든 것이 선교이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Neill 1959:81)고 주장할 수 있는 시대였다. 선교는 교회 전체가 참여하되 선교사라는 명칭은 타문화권 복음 전파를 위해 특별하게 헌신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요즘은 하나님께서 일반 성도들에게도 선교의 문을 활짝 열고 계신다. 안산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멀리 길을 가지 않아도 방글라데시에서 온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미전도 종족이 우리 집 문밖에 다가온 것이다. 또한, 많은 나라가 전문가들을 환영하기에,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타문화권에서 선교에 참여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선교사는 직업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혹은 본질적 사역과 관련된 단어이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선교면 모든 것이 선교다” (Wright 2010: 26)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시대인 것이다.
선교사는 누구인가
이제는 내가 선교사라는 이름을 내려놓지 않아도 호떡을 팔 수 있다. 비즈니스 선교의 시대가 도달한 것이다. 이제는 호떡 장사하는 사람도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아시아 여기저기에서 커피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선교사인 경우가 많다. 호떡을 파는 것이나 커피를 파는 것이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국밥집을 운영하면서 자신을 선교사로 불러 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선교사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어떤 이는 ‘요즘은 너도나도 선교사로 불러 달란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물론 나는 국밥집 주인을 선교사로 부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선교사라는 호칭이 결코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선교사의 호칭을 원하는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도 불러줄 의향이 있다.
그럼에도 비즈니스의 한 방편으로 커피 장사를 하기 위해 온 그리스도인과 선교의 목적으로 커피 장사를 하는 선교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외면적으로 이들의 일상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들 모두 사업을 잘되도록 유지하면서, 종업원을 정당하게 대우하고,손님들에게 친절하며, 기회가 되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커피숍을 운영하는 의도와 목적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다른 지도 모르겠다. 비즈니스의 방편으로 커피 장사를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를 하되 교회에서 후원을 받으면 선교사이고 그렇지 않으면 선교사가 아닌가? 전문성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사람은 비즈니스맨이고 약간 어설프게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사람은 선교사인가?
선교사는 특권인가
나에게 있어서는 선교사가 나의 직업 혹은 전문 직종이었다. 나는 선교사라는 직업을 진작에 내려놓았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이 직업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호떡 장사를 할 기술과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그것으로 먹고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로서 누리고 있는 명성과 특혜의 달콤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이유가 될 것이다.
나는 선교 단체가 선교를 독점하려는 의도를 포기하고 선교를 교회에 돌려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가 아닌 선교 단체가 선교를 주도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인 지에 의문이 있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가 중심이 아니고 변두리에 자리 잡고있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선교적 교회’라는 건강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이상한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교회라면 선교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교회 앞에 선교적이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를 모르겠다. 선교사도 선교를 독점하려 하지 말고 성도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선교는 선교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선교사라는 명칭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과한 주장일까? 언제부터 교회 안에 선교사라는 독특한 집단이 있었는가? 사도, 목사 혹은 장로, 집사 이외에 직분을 성경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초대 교회 성도들은 굳이 선교사라는 이름을 갖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선교에 참여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선교와 뗄래야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는 주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선교사라는 껍질을 벗고
비행기 안에서 입국 신고서를 쓸 때마다 한 순간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질문이 있다.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는 나라로 이슬람이나 공산주의 국가로 들어갈 때는 이 고민이 좀 더 심각해진다. ‘선교사로 쓸까?’ ‘선교사라는 것이 직업이 될 수 있나?’라는 고민과 함께 ‘선교사로 쓰면 곤란해질 수도 있을 텐데’라는 생각에 선교사로 나의 직업을 적는 것이 주저된다. 선교사 신분이 아니었으면 선교 활동을 하기가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목사로 쓰는 것도 썩 마땅치 않다. 나는 목회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나의 정체성이 순간 혼란스러워 진다. 사도 바울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면 자신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적었을 지 궁금하다. 사도로, 선교사로, 아니면 텐트 혹은 가죽 비즈니스를 하는 상인으로 적었을까?
선교사라는 명칭이 이제는 직업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혹은 본질적 사역과 관련된 단어로 쓰이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선교사 혹은 선교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선교사라는 호칭은 더는 명예 혹은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교사들이 선교사라는 껍질을 벗고 다른 직업으로 경력을 전환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본다.
참고 문헌
Neill, Stephen 1959. Creative Tension, London: Edinburgh House Press
Wright, Christopher 2010. The Mission of God’s People: A Biblical Theology of the Church’s Mission, Grand Rapids: Zondervan
귀한 글 나누어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