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섭, Managing Director of MCTC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도서 3:1
선교사는 떠나야만 한다. 선교사는 주인이 아니요, 잠시 머무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선교사가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선교사로 헌신하고 선교지로 들어오는 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큰 결단이었던 만큼, 그가 선교지를 떠난다는 것 또한 크나큰 결심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는 언젠가는 선교지를 떠나야 한다. 어차피 선교사가 묻힐 곳은 선교지가 아니요 본국이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떠나야 할 때를 8가지로 생각해 보자. 물론 이 밖의 떠나야 할 이유로 들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부끄러운 이유이기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 소명이 지속해서 흔들릴 때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소명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도 있다. 문제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 결정해서 선교지로 온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빨리 선교지를 떠나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지 선교지에 유익하고 본인도 행복하다. 선교지는 자원봉사자가 오는 것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자가 오는 것이다(박기호 2006:web).
선교 집회에서 강사의 초청에 얼떨결에 손을 들었거나 강단 앞으로 나갔을 수도 있다. 선교사가 보여준 슬라이드에 받은 감동이 가슴에 남아있어 선교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각자 나름의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감정은 수없이 흔들리고, 우리의 기억은 여러 파편이 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명이 지속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증명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없다면 선교지를 떠날 것을 고려하는 것도 모두에게 나쁘지 않다.
- 선교사로서의 삶이 재미가 없을 때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에 왔는데 삶과 사역이 영 재미가 없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지루하고,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된다. 현지인들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을 볼 때 짜증이 난다. 선교지에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 내가 선교사가 된 것이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든다면, 선교지를 떠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여성 선교사는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우리네 지방 도시의 버스 대기실 같은 아프리카의 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감격에 젖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귀찮게 하고 파리가 얼굴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이 그를 실망시키기보다는 그로 하여금 선교사로서의 감격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그는 면역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온몸에 두드러기 나고 말라리아로 고열이 나도 선교지에 존재하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이처럼 선교사가 척박한 땅에서 존재할 수 있는 동력은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과 감사함이다. 선교사는 때때로 관계와 사역, 그리고 삶에 있어서 좌절이 오고 짜증도 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선한 일에 자신과 같은 사람을 부르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감사가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만약 선교지에서의 자신의 존재가 힘들게만 여겨진다면, 그리고 마음속에 감격과 감사를 찾기 어렵다면 이제는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사역에 열매가 없을 때
언어를 아무리 배워도 늘지가 않는다. 교회를 개척했는데도 교인들이 늘지 않는다. 한국에서 단기선교 팀이나 오면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볼거리나 받을 거리가 있어 조금 더 모일 뿐이다. 그간의 사역 열매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면 그 내용이 영 신통치 않게 느껴진다. 자신의 신세를 탓하면서도, 선교사가 선교지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선교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소망을 갖고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 때로는 노아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노아는 수십 년 동안 방주를 지었지만 그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의 가족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선교사는 자신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처럼 열매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노아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노아는 적어도 모든 종류의 동물들과 적어도 자신의 가족을 구원했다.\
열매가 없는 것은 젖혀 놓고서라도 아예 일거리 자체가 충분하지 않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쉬고 싶으면 쉰다. 장을 봐야 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주어야 하고 큰아이를 방과 후에 수영장에 데려다주는 것이 오늘의 주요한 일과다. 어차피 사무실도 없고 사역도 그리 많지 않으니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 스트레스다. 오전은 누구와 만나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음식을 먹으면서 세계 선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나마 만족스럽고 의미 있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일거리가 없다면 게으른 종이라는 준엄한 질책을 받기 전에 선교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는 것이 상식적일 것이다.
- 질병에 걸렸을 때
이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본인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게 되면 선교지를 떠날 수밖에 없다.
- 가족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족 중에 누군가가 계속 아프거나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게 되면 선교지를 떠날 수밖에 없다.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들이 선교지에서 적응을 못 하는 경우가 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현지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속히 선교지를 떠나야 한다. 선교를 이유로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들을 방치하거나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어느 선교사는 고산 지대로 가면 아내가 아프고 저지대로 가면 자신이 아파서 선교지를 떠났다고 한다. 왠지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아팠던 한 선교사는 치료를 받기 위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손에 든 순간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아픔이 사라졌다고 한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떠나는 것도 훌륭한 결정이다.
나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다. 그의 아내 도로시(Dorothy)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로시는 남편의 설득에 마지못해 인도로 떠났고 결국 그녀의 인도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 5살이던 아들 피터(Peter)가 열병으로 죽은 후 도로시는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망상 장애로 인해 남편의 부정을 확신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심한 욕지거리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칼로 그를 찌르려고 했다. 그녀는 12년 동안 그 질병을 갖고 살다가 열병으로 51세 나이에 생을 마쳤다. 윌리엄은 그녀가 죽기까지 그녀를 방안에 12년 동안 가둬 놓았다(Beck 1992: web). 나는 윌리엄 캐리의 결정에 대해 시시비비를 걸려는 생각이 없다. 단지 나라면 내 아내의 치료를 위해 선교지를 떠났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음과 같은 윌리엄 캐리의 위대한 글귀가 썩 마음에 흡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or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성도들은 선교사 자녀들이 거의 모두 잘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하나님께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생각이다. 우리들은 잘된 선교사 자녀들의 이야기만을 들어왔다. 어느 선교사가 교인들 앞에서 문제 많은 자신의 자녀를 드러내겠는가? 나는 자녀들을 돌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부모가 자녀들을 돌보지 않으면 그 자녀들은 십중팔구로 잘못된다. 내가 만난 한 미국 선교사 자녀로부터 그녀의 오빠 중 한 명은 무신론자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동성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기숙사가 딸린 선교사 자녀 학교에서 성장한 자녀들이다. 이게 어디 서양 선교사 자녀들에 국한된 이야기인가? 나는 잘못된 한국 선교사 자녀들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어왔고 오늘도 듣고 있다.
- 후원이 끊어졌을 때
후원이 끊어졌다고 선교지를 떠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떠나는 것을 고려할 수는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보내셨다면 재정적인 필요도 채워 주시기에, 재정적인 공급이 끊겼다면 돌아가라는 신호가 아닐지 누가 알겠는가? SIM은 붉은색의 로고 아래 ‘by prayer’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기도로 사역을 한다는 의미이겠지만, 기도로 먹고산다는 의미도 있다고 여겨진다. 서구의 선교 단체들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시면 반드시 그의 재정적인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 이 신념 때문에 선교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종종 생긴다. 후원금이 채워질 때까지 선교부가 그를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교에 있어서 교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파트너이다. 교회가 선교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면 선교 사역을 그만하라는 신호가 아닐지 생각해 보는 것도 옳다는 생각이다. 물론 다른 후원 교회를 찾을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추방되었을 때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추방이 되거나 비자가 거부되어 선교지를 떠나는 선교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추방되거나 비자가 거부된 선교사는 그 나라를 떠났을 수밖에 없다.
- 다른 직업을 갖고 싶을 때
선교사로서의 삶도 재미있고 사역의 열매도 있지만, 이제는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의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이 사라지지 않고 나타날 수가 있다. 물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풍선은 손을 떼는 순간 물 위로 다시 올라오듯이, 이 꿈도 아무리 눌러도 한순간에 떠 오른다.
어느 선교사는 대학 시절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는 오지에서 사역하면서도 이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그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였지만,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꿈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 맡겨진 사역을 마무리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나서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좋은 연극을 만들고, 그 연극을 통해 복음을 드러낼 수 있다면 점점 미전도 종족으로 변화되고 있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는 기회이다
선교사에게 닥치는 위기는 경력 전환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막는 범죄일 수도 있다. 닥쳐오는 파도를 에너지로 삼아 서핑을 타야 한다. 이 기회가 지나가면 언제 이와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모세나 요셉에게 있어서 위기가 경력 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문제는 경력 전환은 위기가 시작될 때 시작하면 늦다는 점에 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을 기억하라. 내가 없어도 선교는 진행되고 어쩌면 더 잘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운동장에서 우리는 잠시 우리의 선교라는 공을 차다가 갈 뿐이다. 게임이 끝나거나 저녁노을이 질 때면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엄마가 부르면 아쉬움을 남긴 채 차던 공을 내려놓고 갈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선교지를 중간에 떠나야만 한다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참고 문헌
박기호 2006. “선교역사에서 본 이민교회의 선교적 특성 2.” . 기독일보.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3608/20061018/기고-선교역사에서-본-이민교회의-선교적-특성-2.htm
Beck, James R. 1992. “Dorothy’s Devastating Delusions”. Christian History Institute https://christianhistoryinstitute.org/magazine/article/dorothys-devastating-delu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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